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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Casey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1회   작성일Date 25-04-2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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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문은 소설책출판 사실이었다.‘기는 일본군, 뛰는 김좌진, 나는 홍범도’라는 그 소문. 홍범도 장군이 하늘을 날고 있다.8월 15일 맑은 대한민국 하늘을 홍범도 장군은 날고 있었다.그가 대한민국 영공에 진입하자 양옆에 대한민국 공군기 여섯 대가 각각 세대씩 호위하며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오는 그를 환영했다.나는 그 장면을 2023년 7월의 오늘. 유튜브를 통해 다시 보고 있다.2년전에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땐 멀리 타국에서 잠든 독립투사의 유해를 모셔오는 커다란 비행기였는데 오늘은 커다란 비행기가 아니라 소설 ‘범도’의 소문처럼 하늘을 날아 조국으로 돌아오는 홍범도 장군의 모습으로 보였다. 처음 그 장면을 봤던 2년전엔 나는 부끄럽게도 홍범도 장군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장군이었다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그것도 그날을 기준으로 비교적 최근에 상영된 영화를 통해 알게 된 사실이었다. 제대로 그에 대해 아는 게 없었지만, 100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온다는 자막과 대통령의 연설 그리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서훈 받고 국립대전 헌충원에 무사히 안장되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홍범도 장군만이 아닐 것이다.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들 그리고 소설책출판 친일 역사학자들의 편협한 기준에 의해 왜곡 당하고 편집당한 독립군들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그 편집된 수많은 독립군들의 상징으로 느껴졌다.소설 ‘범도’를 읽고 다시 생각해 보니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게 없다. 소설 속 그 시대엔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출신에 따라 사람을 나누더니, 해방된 조국은 기득권의 기준에 따라 독립군의 공적을 평가했다. 그 누구도 자신의 정치적 이념 때문에 독립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오직 왜놈으로부터 나라를 되찾겠다는 같은 마음 하나로 목숨을 걸고 싸웠던 건데, 해방 후 소위 일부 전문가들은 일제 강점기 독립군으로서의 기여도와 공적이 아닌 지금의 정치적 이념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고 있다. 독립운동과 친일 행위는 일제강점기 때 했던 행동이 그 평가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을 무시하고, 평가하는 세력과 같은 정치적 이념이라면 매국 행위를 했다 하더라도 현충원에 묻힐 수 있고, 그 반대의 상황이라면 조국의 해방을 위해 어떤 위대한 공을 세웠더라도 배척당할 수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방송을 보면서 마음이 뭉클했던 이유는 홍범도 장군이어서만은 아니었다. 해방 소설책출판 후 그런 어이없는 평가 기준으로 편집 당한 수많은 독립군들 중에 한 사람의 유해가 지금이라도 조국으로 돌아오고 있는 장면 때문이었다. 이것을 시발점으로 앞으로도 더 많은 독립군들이 말도 안 되는 지금의 잣대가 아니라 일제 강점기의 독립활동을 기준으로 제대로 평가받는 세상이 오길 바라는 바램을 마음에 묻고 그 표식에 ‘홍범도’라는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리고 얼마 전 문학동네 블로그에서 ‘범도’라는 책이 출간된다는 소개 글을 발견했다. 2년 전 마음에 새겨져 있던 '홍범도'라는 이름이 반짝거렸다. 방현석 작가님이 집필부터 탈고까지 10년이 넘게 걸렸다는 문구와 ‘시대의 절망을 저격한 조선 최고의 스나이퍼’라는 소개 글이 인상에 남았다. 홍범도 장군. 보통 ‘장군’이라는 직위를 떠올리면 전장의 뒤에서 작전만 짜는 사령관 이미지였는데, 일제 강점기 당시 직접 전투의 선두에 참가한 스나이퍼였다는 사실. 그것도 호랑이를 잡던 포수였다는 점이 신선했다. 나는 기대를 안고 책장을 조심스레 안고 넘겼다.​이 책은 독립군 홍범도 장군에 대한 이야기만은 아니다.전체 분량을 기준으로 봉오동 전투 장면과 청산리 전투 장면의 비중은 예상보다 그리 많지 않다. 그 시대에 소설책출판 주변국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유명하고 위대한 승리의 업적을 남긴 대한독립군 사령관 홍범도의 전투 이야기가 모든 게 아니었다. 소설 ‘범도’는 가장 불안했던 시대를 살아낸 한 인간의 삶을 통해 그 시대 전체의 물결을 설명하려고 하는 듯했다.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비유를 하자면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 과거의 공간에 홍범도라는 손전등을 켠 거 같다고 할까. 독자들이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 하는 그 시대의 장면을 비추기엔 홍범도라는 손전등만큼 적절한 게 없다. 그 손전등은 성능 또한 매우 뛰어나고 그립감까지 좋아서 한번 손에 쥔 사용자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책을 놓을 수 없게 했다. 그것은 우리가 명확하게 봐야 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역할에 충실했다. 얼마나 환하게 잘 비춰주던지, 그 시대의 상황들이 시간차 없이 지금 눈앞에서 보는 듯한 생생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리고 장면 장면마다 홍범도라는 손전등의 심정이 그대로 손을 타고 심장으로 전해지는 듯했다. 상부의 명령에 따라 같은 동포인 농민들을 진압해야 할 때는 함께 속상했고, 비무장이나 다름없는 상대가 가벼운 부상만 입고 소설책출판 해산할 수 있도록 힘 조절해서 진압할 때는 함께 유쾌했으며, 백무아와 만나는 장면마다 옆에 있는 듯 설레고 애틋했다.전쟁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겠지만 그가 아끼는 친구가 죽고, 아들이 죽고, 대원들(특히 김수협)이 죽을 때는 함께 속상하고 슬펐고, 그를 잡지 못한 일본군들이 조선의 민간인들에게 몸쓸 짓을 하는 장면과 번번이 중요한 순간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밀정들의 야비한 행위를 읽을 때는 함께 화가 났다. 작전을 위해 변변한 신발도 없이 짚신으로 눈이 덮인 산속을 전진해야 했을 땐 내 발도 함께 시린듯했고, 봉오동 골짜기로 적들을 유인해서 전멸했을 때와 퇴각하는 적들끼리 서로 오인해서 죽이고 죽일 때는 통쾌했다. 하지만 그 승리가 영원하지 못할 거라는 걸 이미 역사책을 통해 알고 있던 나는 곧이어 안타까움 속에 빠져들었다. 만약, 그들 뒤에 우리 동포의 십시일반이 아니라 제대로 된 국가의 지원이 있었다면. 조선의 왕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신분과 출신을 초월한 그들의 군대와 함께 싸웠다면 일본군을 상대로 충분히 싸울만하지 않았을까?그 지도자가 김수협처럼 앞물결과 뒷물결을 아우르며 생각할 줄 아는 열린 소설책출판 생각을 가졌더라면, 우리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더 강한 나라가 되었을테고 역류 없이 자연스러운 앞물결과 뒷물결의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1권의 중반 이후부터 줄곧 나를 따라다녔다. 그런 마음들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그저 독자가 아니라 또 하나의 동료로 만들어 줬다. 나는 카페에서, 집에서, 도서관에서 두꺼운 책을 열었고,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홍범도 장군이 있는 그 자리에 함께 존재했다. 그런 기분으로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수 있었던 이유는 홍범도 장군에게서 그 어떤 이질감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이룬 업적은 감히 범인은 근접할 수없이 위대하지만, 인간 홍범도에겐 그 어떤 심리적인 벽이 느껴지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봉건사회에서 최하층민으로 태어났고, 산속에선 포수로, 일제강점기엔 일본군에게도 인정받는 최고의 스나이퍼였지만 그가 사람을 대하는 방식과 관계에 대한 인식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그가 살던 시대와는 많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는 일본군뿐만 아니라 수많은 보이지 소설책출판 않는 적들과도 싸워야 했다. 그는 시대적 파벌과 관습에 얽힌 세상에 숨구멍을 뚫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열린 마음은 그가 연이어 이뤘던 대승만큼이나 위대한 것이다. 그는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군에서 배제될 뻔했던 진포를 위해 싸워서 지켰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무시당할 수 있는 청년 대원들을 위해 독립군 활약의 중심에 그들이 서도록 힘썼다. 그는 단 한 번도 스스로의 공적을 과시하거나 그것으로 어떤 이득을 취하려고 한 적도 없다. 오히려 단지 그 사람의 성별 때문에, 나이 때문에, 신분 때문에 본래의 실력을 한번 발휘할 기회조차 갖지 못하는 자들이 돋보일 수 있도록 노력했다. 백무아가 홍범도에게 북극성이었다면, 홍범도는 독립군이라는 별이 더욱더 밝게 빛날 수 있도록 스스로 어둠을 내어주는 밤하늘과 같은 존재였다.그런 그의 성향 덕분에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들은 누구보다 스스로 밝게 빛난 삶을 살다가 갔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내세우지 않는 그의 그런 성향 때문에 후대에선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소설 ‘범도’를 읽고 홍범도가 더 소설책출판 궁금해져서 그의 이름을 검색창에 넣어봤다.내가 찾은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독립군으로서의 업적이 아니라 냉전시대 정치적 이념 프레임에 끼워 맞춰 평가절하하는 말도 안되는 글들이 의외로 많았다. 홍범도 장군뿐만 아니다. 해방된 지 70년이 훨씬 지났지만, 해방 후 청산되지 못한 친일파와 그들의 영향을 많은 자들은 여전히 수많은 독립군들의 업적을 축소하고 왜곡하고 있다.요즘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K 문화도. 지금 쓰고 있는 한글도, 그리고 우리의 한글 이름도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포기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싸운 우리의 독립군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우리의 역사에 그런 분들이 계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일본어 이름표를 달고, 그들에게 차별받으며 그것이 당연한 세상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반드시 이 부분을 잊지 말고 그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2021년 8월 15일 대한민국 영해를 날아오던 홍범도 장군 양옆에는 공군기 세대가 그를 호위하며 환영했다. 내 눈에는 그 호위하는 전투기가 김수협, 진포, 임창근, 이정재, 맹포, 남창일로 보였다. 맑고 선명한 파란 하늘.사냥하기 딱 좋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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